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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우리를 감옥에 갇힌 쥐처럼 다루는 11가지 방식들: 중독은 그러한 갇힌 느낌에서 발생하는 것 아닐까요?

by 제이미잼잼 2023.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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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우리를 감옥에 갇힌 쥐처럼 다루는 11가지 방식들 : 중독은 그러한 갇힌 느낌에서 발생하는 것 아닐까요 by 찰스 아이젠슈타인 Charles Eisenstein

 

June 16, 2014 by Charles Eisenstein, The Fix

Waking Times

 

 

 

 중독은 도덕적 결함 혹은 생리적 기능장애라기보다는 환경에 대한 적응 반응이 아닐까요?

 

 아마도 음식도 먹지 않고 굶어 죽을 때까지 강박적으로 헤로인 공급 레버만을 반복해서 누른 우리에 갇힌 실험 쥐의 중독성 연구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들은 인간 본성에 대해 꽤 낙심하게 만드는 의미를 담고 있어 보입니다. 우리의 생리적 본능은 불안하며 재앙에 이를 정도로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 교육, 도덕성에 대한 터득을 통해 생리적 욕구를 극복해야 하며 의지와 도덕이 약한 이들은 교화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의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쥐의 중독 실험은 또한 마약과의 전쟁의 주요한 목적을 타당해 보이게 합니다. 첫 번째는 '금지'로서 쥐가 약의 맛을 알게 되는 걸 막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육'으로서 처음부터 그 레버를 누르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처벌'로, 약을 취한 결과는 너무 끔찍하고 불쾌해서 다시는 레버를 누르고 싶은 욕구를 극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듯이, 어떤 쥐들은 다른 쥐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높은 도덕성을 가진 쥐들에게는 교육으로 충분하지만 그렇지 못한 쥐들은 처벌로써 그만두게 해야 합니다.

 

 알렉산더는 쥐를 작고 분리된 공간에서 꺼내 넓은 공간의 쥐를 위한 공원에 충분한 음식과 함께 다른 쥐들과 교류하게 하고 충분한 운동을 한다면 약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실상 이미 중독된 쥐들도 우리에서 공원으로 옮겨진 후에는 약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마약과의 전쟁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특징들은 통제의 형태를 띄며 그래서 기술 문명의 넓은 범주안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범주는 본성에 대한 지배, 원시적 상태를 극복하는 것, 동물적 욕구를 마음으로 그리고 기본적 충동을 도덕심으로 정복하는 것 등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갇힌 쥐 실험에 대한 부르스 알렉산더의 대단한 도전의 의미가 여러 해 동안 무시되고 드러나지 못한 이유입니다. 그의 연구는 마약과의 전쟁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과 세상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패러다임에 의문을 야기시켰습니다.

 

 약 중독이 의미하는 것은 도덕적 결함 혹은 생리적 기능장애가 아닌 환경에 대한 적응 반응입니다. 쥐를 우리 안에 가둬놓고 약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 처벌을 가하는 것은 꽤 잔인한 일입니다. 그것은 질병을 일으킬만한 환경을 유지하면서 질병의 증상을 억누르는 것과 같습니다. 마약과의 전쟁의 효과가 더딘 것에 대한 주된 원인은 아니더라도 알렉산더의 연구는 비유적으로 이것과 확실히 일치합니다. 우리가 우리에 갇힌 쥐 같을까요? 우리가 스스로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고 그 고통을 경감시키려는 노력에 대해 처벌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마약과의 전쟁은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고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갇힌 쥐와 같다면 그 감옥의 본질은 무엇이고 인간을 위한 쥐들의 공원과 같은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인간을 우리에 갇히게 만드는 환경들입니다. 

 

— 가능한 의미 있는 자기 표현과 봉사의 모든 기회들을 제거합니다. 그대신 사람들이 단지 수표를 지불하고 빚을 갚도록 꿈도 희망도 없는 노동을 하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노동으로 대신 살아가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 사람들을 자연과 장소로부터 단절시킵니다. 기껏해야 자연은 경관을 지니고 휴양을 위한 장소일 뿐 음식과 의약품의 공급원을 최대한 멀리 배치해 자연과의 어떤 친근성도 제거합니다. 

— 사람들의 삶을  특별히 아이들의 생활을  실내에서만 이루어지게 합니다. 가능한 많은 소리는 제작된 사운드와 많은 가상의 화면을 접하게 합니다. 

— 사람들을 의지할 수 없는 심지어 이름도 모르는 낯선이들 속으로 던져 공동체적 연대감을 파괴합니다. 

— 돈을 의도적으로 부족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돈에 의지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에 대한 불안감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킵니다. 항상 돈보다는 빚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금융체제를 관리합니다.  

— 사람들을 재산에 따라 분리하고 돈을 지불한 사람들만 공간을 확보하도록 합니다.  

— 모든 사람들이 독특하고 무한한 다양성과 예술성이 돋보이는 자연을 모두 동일한 공산품으로 대체합니다. 

— 사회적 교류의 친밀한 영역을 핵가족으로만 축소시키고 가족을 박스에 가두고 사회적 단위의 기능을 하는 부족, 마을, 일족 등의 확장된 가족을 파괴합니다. 

— 아이들을 나이별로 분리된 경쟁적인 환경의 교실에 머무르게 합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좋아하거나 원하지 않지만 외부적인 보상을 위해 학습을 해야 합니다. 

— 정체성을 형성하는 마을의 이야기와 관계들을 파괴하고 권위에 의해 주어진 세계관이나 유명인 뉴스, 스포츠 팀 정체성, 브랜드 위주의 정체성 등으로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 다른 이들을 치유하고 보살피는 지식들을 불법화하고, 건강을 위한다는 의학 권위에 의존하는 환자의 패러다임으로 대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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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의 사람들이 마약이든 소비든 포르노이든 도박이든 과식하는 것이든 강박적으로 그 레버를 누르는 것이 놀랍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친밀함, 연대감, 공동체 의식, 아름다움, 만족, 의미 등의 실질적인 인간 욕구가 대부분 충족되지 않은 환경에서 수 백만 가지의 방식으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 감옥은 대부분 우리들 자신의 개별적인 묵인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 한번의 깨달음이나 일생에 걸친 노력만으로는 우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갇힘에 대해 익숙해진 습관은 깊이 프로그램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도관을 없앰으로도 탈출할 수 없습니다: 쥐 실험과는 달리 그리고 음모이론과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엘리트 계층들도 나머지의 우리만큼이나 죄수 같은 처지입니다. 자신들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로 인한 공허함과 중독적인 보상 심리는 그들이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게끔 역할을 하도록 유혹합니다.

 

 우리는 갇힌 고통에서 쉽게 탈출할 수 없습니다. 갇힌 상태는 현대 사회에서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며 그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우리 자신의 내면에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분리, 지배와 통제에 대한 깊은 이야기가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대 전환, 의식에서의 변환의 시기에 다가가면서 또한 그들의 방식들이  감시 체제, 벽과 장애물, 환경적 황폐화 등  선례가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핵심은 흠집이 나면서 토대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나는 마약과의 전쟁의 법안을 제외한 것은(여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상위구조들 또한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초기의 신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마약 전쟁의 끝이 그러한 신호가 아닐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약들은 감옥 안에 갇힌 삶을 좀더 인내할 수 있게 만들고, 사회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 대중의 아편은 말 그대로 아편들입니다! 제국주의, 생태계 파괴의 공격을 막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행진의 속도를 느리게 하지도 못하는 무의미한 승리를 위해 마리화나의 합법화를 무력화 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약물이 우리를 갇힌 생활에 좀더 적응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적응을 잘하는 일꾼이나 소비자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효과적인 것은 카페인입니다  탁월하고 실질적으로 거의 규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은 일의 스케쥴에 맞출 수 있도록, 좋아하지 않은 일에 집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카페인이 하도록 한다는 것이 아니며,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공급되는 유일인 허브인 차나 커피와 같은 신성한 식물들을 비하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알코올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사실상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좀더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특정한 다른 약품들  자극제와 아편들  또한 그러한 기능들을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소비자들을 쇠약하게 만듦으로써 자본주의 수호자들은 그것들을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마리화나와 환각제 같은 다른 약들은, 직접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소비자적 가치가 떨어지고 이전의 일반적인 삶에 대한 인내심을 떨어뜨립니다. 예를 들어 마리화나를 피우는 행동들을 생각해보세요. 약을 하는 사람들은 일을 하러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타를 연주하며 풀밭에 앉아있을 수 있습니다. 전혀 경쟁적이지 않습니다. 마리화나를 하는 사람이 사회에 전혀 공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문에 의하면 가장 부유한 정보 사회 사업가는 마리화나를 핀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마리화나와 환각제가 기존 질서를 방해한다는 것은 근거가 있습니다.

 

 여러 주나 국가에서 마리화나의 법적 허용은 주춤거리고 있지만 실질적인 단계들을 밟아가고 있는데 그것은 잘 알려진 범죄, 투옥, 약용과 상업적인 마리화나 사용의 혜택들을 넘어서는 여러가지 이유들로 중요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지배력의 해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금지, 처벌, 심리학적인 처벌에 대한 해제입니다. 둘째로 방금 논의한대로, 통제의 대상인  마리화나  는 우리가 갇혀있는 감옥을 부식시키고 있으며, 세 번째로 분리에서 멀어지고 연민으로 다가가려는 우리의 의식에서의 깊은 변환에 대한 것입니다. 

 

 통제에 대한 생각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통제해야 하는 가에 대해 미리 단정하는 것입니다. 마약과의 전쟁은 사회 심리학자들이 기질주의(dispositionism)라 부르는, 지속적인 성향과 선호를 가진 인간 존재들은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마약 사용자들을 비난합니다. 기질적 성향주의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들은 좋은 선택을 하고 나쁜 사람들은 나쁜 선택을 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범죄에 대한 우리의 법적 정의 체제가 그렇듯이 억제, 교육, 금지는 본질적으로 그러한 철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화의 전체적인 개념에 일관적으로 흐르는 사상은 심판이나 가부장주의를 바탕으로 합니다. 거기서 말하는 기본 원리는 내가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분리에 대해 단언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과 다릅니다(당신이 마약 중독자라면 그보다는 휠씬 나은 판단을 했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테러에 대한 전쟁이나 그와 유사한 것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바랍니다. 그에 비교될 수 있는 사상으로 사람은 상황의 내부적, 외부적인 전체를 보고 선택을 한다는 상황주의(Situationism)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당신의 전체적인 삶의 히스토리를 포함해서 당신의 상황이 된다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것은 분리가 아닌 연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일은 부르스 알렉산더가 우리에게 보여줬듯이, 자기 파괴나 반사회적 행동은 기질적 약함이나 도덕적 결함이 아닌 환경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상황주의는 전쟁보다는 치유를 촉구합니다. 그 사상은 테러, 마약 중독, 잡초, , 탐욕, 사악한 행위 등으로 전쟁을 선포하기 보다는 그러한 증상들이 발생하게 되는 환경을 이해하고 바로잡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약 사용을 처벌하기 보다 어떤 환경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지를 묻습니다. 살충제로 잡초를 제거하는 대신에 어떤 토양이나 작물하는 방식이 그것들을 자라게 했는지를 생각합니다. 강력한 살균제로 하는 위생방법이나 광범위 항생제를 사용하기 전에 육체의 어떤 상태가 균이 번식하기에 좋은 환경인지를 생각합니다. 항생제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다른 이들을 해치는 난폭한 범죄자를 가두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악은 정복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여기에 약물합법화가 내가 악과의 전쟁(War on Evil)이라 부르는 오랜 세월 동안 이어온 패러다임의 반전과 어떻게 일치하는 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문명일수록 혼란의 정복과 자연을 길들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랜 역사 동안 전체인구뿐만 아니라 지구까지도 다 태워버릴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좀더 온화한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자연과 식물에게서 얻은 무언가가 그 전환의 중심점이 되는 것이 들어맞습니다. 마약과의 전쟁의 종식으로 점점 증가하는 움직임은 심판, 비난, 전쟁, 통제로부터 연민과 치유로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리화나가 자연스러운 시작점일 수 있는데 그 광범위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그 사용자들을 도덕적 결함이 있는 이들로서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는 상징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전적으로 당신의 입장이었다면 나도 피웠을 것입니다  사실 그러합니다!’

 

 마리화나는 그 자체로는 그렇게 위험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약 중독의 습관이나 문화로 이끌 수 있다는 초기약물로써 비난 받아 왔습니다. 그러한 유언비어는 그 진실을 드러내고 있지만 아마도 마리화나가 다른 종류의 시작점 약품의 폭넓은 합법적 사용과 그것을 넘어서 처벌이 아닌 연민과 인간적인 법체제로 들어가는 입구- 일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좀더 넓게는 기계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방어하고 정복하고 통제해야만 하는 이들과 경쟁하고 분리되는 영역이 아닌 유기적 가치, 생태적 세계, 환경친화적 세계로 다가가는 입구를 제공해줄 수도 있습니다아마도 약물 합법화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기존 사회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측면에서 보수주의자들이 맞았을지 모릅니다.

 

http://www.wakingtimes.com/2014/06/16/11-ways-society-treats-us-like-caged-rats-addictions-stem-trapped-feeling/

* 역주: 위의 글은 사회를 보는 관점의 전환에 대한 필요성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ims61C1i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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