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마음의 개념입니까 혹은 실질적인 경험입니까?
by 킴 마이클즈 Kim Michaels
질문: 안녕하세요, 지난 6개월 동안 여기에 있는 많은 글을 읽었습니다. 나는 전통적인 크리스천이지만 여기의 많은 글이 가슴을 울리고 시야를 넓혀줬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 내용을 수용하고 진정한 영감을 얻는데 방해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 가능하다면, 명확히 알고 싶은 주제가 있습니다. 수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신에 대한 공경(Godliness)의 개념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이해하기 힘든 정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질문은 ‘당신 이외의 신은 없다’라는 개념에 대해, 나의 신에 대한 경험은 신은 더 큰 실체, 나보다 크고, 우리를 모두 합친 것보다 크고, 모든 상승한 마스터들보다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신성한 사랑으로 둘러싸이는 느낌이 들 때 나 자신에 의해 둘러싸인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나의 밖에 있는 신이 나의 에고와 함께 내 안에서 진동할 때 신성한 사랑인 신과의 관계를 느낍니다. 신은 나의 전체를 둘러싸면서 관통하는 동시에 나보다 훨씬 큽니다.
여기서 알려준 내용은, 관계에서의 두 가지 측면은 나 자신의 두 가지 측면을 말한다고 합니다. 나 자신의 두 측면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두 측면이 나의 확장인 다른 이들과 사랑에 빠지는 만큼 진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진정한 공명과 풍요로움은 서로 동질 하지 않은 어떤 것, 어떤 이와의 관계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가 신(우리들 보다 큰 실체로써)과 관계를 가지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신(우리 안에 있는 신)과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로 볼 때 그 관계가 최소한 어느 정도는, 우리보다는 큰 신의 존재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나의 경험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준다면 이 주제에 대한 당신의 가르침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축복인 당신의 봉사에 대해 감사히 여깁니다.
킴 마이클즈를 통한 상승한 마스터인 예수의 대답: August 17, 2010
그 주제와 관련해서는 실질(substance)과 의미(semantics)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의 현존은 무한한 반면 모든 언어는 한정적입니다. 신의 현존을 단어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신의 현존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질문은 사람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에 집중할 것인지 혹은 그것들을 넘어서 자신들의 내면(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에 있는 무한한 존재를 직접 경험하는 것에 마음과 존재를 열지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영(the Spirit)과 같은 특정 단어들의 숨겨진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건 그 생각의 저변에 어떤 단계의 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단계의 의식을 가진 이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특정 단어들과 논쟁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된 후 우리는 신(사실상, 이것은 모든 주제에 해당하지만, 특별히 신에 관한 주제를 다룰 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어떤 수준의 의식을 위한 단어를 선택해야 하고 그에 따라 낮은 의식을 가진 이들이 공격하고 논쟁할 거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때로는 높은 수준의 의식에 있는 이들조차 한정적인 단어들이 완벽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또한 좀 더 낮은 의식을 가진 이들을 위해 채택된 단어라는 걸 모르고 논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 생략
이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하였지만, 여정에는 여러 단계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 여정은 낮은 곳에서 높은 수준의 의식으로 올라가는 나선형의 계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계단에서 어떤 이의 의식 수준의 핵심은 그 사람이 자신을 형태와 동일시하는 정도로 결정되며 그래서 그 형태가 자신의 영(Spirit)을 지배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의식의 낮은 단계에서는 신은 없고 그래서 자신에게 영(Spirit)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을 형태와 완전히 동일시하고 그래서 형태나 사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지배를 한다고 믿습니다. 단계가 약간 높아지면, 신을 믿지만 저 멀리 하늘에서 어떤 이들에게는 호의적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는 일종의 마법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고차원의 인식으로 성장하면서 신에 대한 개념도 점차 변하게 되며, 결국은 신에 대해 좀 더 정교한 관점으로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는 외부적인 존재로서의 종교적 이미지에서부터, 자신의 내면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형태의 내면에 있는 좀 더 영적인, 좀 더 신비한 관점으로 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소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신의 이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개인의 의지입니다. 모든 이들의 의식은 항상 어떤 수준에 위치하고 있고, 신의 이미지는 그 수준에 따라 형성됩니다.
어떻게 고차원의 의식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자신의 신의 이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의지만으로 가능합니다. 이제 그 의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이들에게는 많은 삶들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의 환생인 현재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2000년 전 자신들이 가졌던 이미지에 대해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금은 하늘에 있는 외부적인 신의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도록 정당화하기 위해 나의 가르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 지구에 있었을 때, 내가 제시했던 신에 대한 관점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나의 가르침은 미래, 바로 오늘날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의 왕국에 대한 가르침을 내면화할 준비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가르침은 ‘나는 신과 하나입니다’이며 다른 내용도 그러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됨(oneness)에 좀 더 마음을 열어가면서 여러 단계들을 거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초기에는 신과 하나 됨의 개념은 단지 하나의 개념일 뿐입니다. 이 의미는 찬반 논쟁이 일어날 수 있고 어떤 이는 특정 단어에 대해 논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식의 단계에서는 보통 걸러지지 않은 직접적인 신과 하나 됨의 경험이 없습니다. 부분적 경험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때문에 채색될 수 있습니다.
여러 번 설명한 대로, 형태에 대한 동일시는 양극성과 분리 의식의 작용이며 그리고 그 작용으로 시작합니다. 이러한 의식 상태에 대한 중심적 특징은, 신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신과의 하나 됨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 됨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이미지인 개념을 통해서만 알고 있어 멀리 떨어진 존재로 이해하고, 보이고, 언급됩니다.
여정에서 어떤 직접적인 초월적 경험을 시작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경험들에서 그동안 자신이 가져온 이미지, 마음의 상자를 벗어난 사람이 실체라는 이해의 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경험들은 자신들의 마음의 이미지, 상상의 투쟁을 넘어서는 어떤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해의 틀을 제공합니다.
미래의 진화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의 마음의 이미지에 대한 의문, 심지어 그 이미지들이 그 사람의 삶의 관점에 어떻게 덧칠하고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할 의지에 대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과거의 이미지에 대한 고착 없이 열린 마음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가장 빠른 진전을 이룹니다. 어떤 고정된 이미지에 고착된 이들, 심지어 자신들만이 신에 대한 올바른 이미지를 가졌다는 자만심을 가진 이들은 아주 천천히 진화하거나 때로는 퇴화하기도 합니다.
신의 무한한 현존에 대한 어떤 마음의 이미지도 타당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지점에 이르면 당신은 궁극적인 진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할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신의 현존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마음을 완전히 열 수 있도록 어떤 혹은 모든 마음의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다시 설명하면 당신은 자신의 신의 이미지와 당신의 신과의 관계를 점차적으로 다듬을 수 있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단계의 궁극적 결과는 당신이 신에 대한 모든 마음의 이미지를 내려놓고 심지어 신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생각도 포기해야 합니다.
이 여정에서 좀 더 미묘하게 시작해 볼 지점은 신과의 하나 됨이란 개념의 포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됨에 대한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하나 됨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당신이 어떤 마음의 개념을 고집하는 동안은 당신은 사실상 실제 신이 아닌 그 개념과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예로, 색안경을 쓴 사람입니다. 세상을 실제 그대로 보지 않고 오직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세상에 대한 이미지로 보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창조한 신의 이미지를 너무 사랑해 수많은 생애 동안 그러한 신의 개념과 관계를 이어가기도 합니다. 그들은 신의 고정된 이미지와의 충분한 관계를 경험한 후에 실제 신은 모든 이미지와 개념을 넘어선다는 가능성에 점차적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할 것입니다.
윗글에서 얘기한 대로, 당신은 분리된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들과만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양극성 의식의 가장 미묘한 측면은 '형태'는, 하나(One), 분리될 수 없는, 근본적인 실체의 표현이기보다는 정말(감각과 외부적 마음에서 명확히)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분리된 것처럼 보여야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 됨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과의 하나 됨은 어떠한 관계도 넘어서는데, 하나 됨 안에서 당신은 당신과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어떤 존재와도 관계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분리가 있어야만 이미 지나 개념의 필요가 생깁니다. 당신이 어떤 걸러짐도 없이 직접 경험한 것을 설명하는데 이미지는 필요 없습니다.
부분들이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 됨의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 속에서는 자신과 분리되어 보이는 다른 존재와 관계할 수 없기 때문에 신과 하나 됨은 관계라는 것을 초월합니다. 분리된 것으로 보일 때만이 개념과 이미지에 대한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런 필터 없이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지는 필요 없습니다.
이해하겠습니까? 하나됨에 가능성에 대해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실질적인 경험보다는 여전히 마음의 개념으로서의 가능성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이 단계에 있는 동안 비록 신비한 경험을 가지더라도 마음의 이미지는 그것을 덧칠해서 당신이 여전히 외부적인 존재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는 당신이 그 실체와 하나가 된듯한 감각을 줘서 심지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하나 된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신의 이미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면 외부적인 존재와 관계를 가지는 감각을 포기하는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지만 아주 천천히, 어떠한 대조가 없는 진정한 하나 됨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위의 질문에서, '나 자신의 두 측면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두 측면이 나의 확장인 다른 이들과 사랑에 빠지는 만큼 진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진정한 공명과 풍요로움은 서로 동질 하지 않은 어떤 것, 어떤 이와의 관계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라는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누군가 여전히 자신의 마음의 모든 이미지들을 관통해서 보고 있지 않은 단계에 있다는 걸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보든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분리에서 하나 됨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놓인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단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우리가 양극성 의식의 기본적인 유혹이라 할 수 있는, 두 개의 반대 혹은 분리된 것의 대조가 삶을 더 풍성하게 '보이게' 만들고 있는 걸 설명해 줍니다. 이유 혹은 매우 강해서 많은 사람들이 서사적인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있으며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이들이 양극성에서만 가질 수 있는 대조적인 경험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여기에 잘못을 발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의 법칙은 원하는 만큼 대조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완벽한 권리를 당신에게 줬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러한 대조적 경험이 삶의 전부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본질적으로 그러한 대조가 없는 하나 됨을 다시 진정으로 갈망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신과 하나 되는 느낌이 어떨까요? 이는 낮은 의식에서는 비논리적이고, 무의미하고, 심지어 모순되어 보이는 미묘한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당신의 질문에서 '나의 신에 대한 경험은 신은 더 큰 실체, 나보다 크고, 우리를 모두 합친 것보다 크고, 모든 상승한 마스터들보다 크다는 것이었습니다.'를 보면 당신은 신의 개별화라는 측면에서 신의 전체는 당신, 그리고 나와 우리 모두보다 크다는 것은 완전한 사실입니다. 더 큰 실체라는 신에 대한 느낌은 하늘에 존재하는 전능한 신이라는 양극성의 개념을 만들어주는 점에서 아주 유혹적이라는 건 정확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더 큰 존재의 개개화된 존재로써- (최소한 지구에 있는 동안) 본인보다 더 큰 존재와 하나됨에 이를 수 있을까요?
이 수수께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양극성과 대조를 초월할 필요성에 대해 숙고해 보는 것입니다. 붓다가 왜 적이 없었고 양극성에 힘을 부여하는 걸 거부했는지에 대해, 우리가 설명했던 개념을 생각해 봄으로써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다른 이들이나, 심지어 어둠의 힘에 대해 대립이나 싸움의 입장에 있는 존재라 보지 않음으로써 양극성의 투쟁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필요에 대해 심사숙고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여기에, 행동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러 왔다는 걸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내가 율법학자나 바리새파인들에게 맞섰을 때, 그들에게 반대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핵심적인 생각이 나의 마음의 기본 틀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나 자신을 그들과의 양극성의 전투에 갇혀있다고 여겼으면 상승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양극성의 세상이 제공하는 그 어떤 것도 넘어서 통합과 하나 됨의 경험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행이라는 대조가 있는 행복과는 다르게, 대조가 없는 '축복'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중독이라고 할 수 있는 대조에 대한 갈망을 넘어서는 건 여정에서 아주 미묘하고 힘든 단계입니다.
삶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의 정신 분열증의 상태까지도 이를 수 있습니다. 삶에서 목적을 잃은 듯한 우울증의 상태로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양극성의 투쟁이 당신에게서 매력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은 대조를 초월하는 축복에 진정으로 들어선 것은 아닙니다.
이 단계를 헤쳐나간다는 것은 '영혼 혹은 영(Spirit)의 어두운 밤'처럼, 실질적으로 신(신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자신의 고차원 자아와 상승한 마스터들에게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자신 안에서 신성한 현존을 발견할 때까지 잠시 동안 우리가 한발 물러나 있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외부적인 존재로써 당신에게 계속 반응하고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단지 당신의 성장을 어떤 수준에 고정시켜버리고 분리의 개념을 강화시켜줄 뿐입니다.
이 단계를 통과하는 데에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의식에서의 간단한 전환이 그 과정을 아주 빠르게 끝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확히 당신의 마음의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 –그것에 대한 의문을 의지로 혹은 본의 아니게 가지든- 그 단계를 헤쳐나가는 데 얼마나 걸릴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그 어두운 밤을 헤쳐나가는 것에 대한 열쇠는 개별성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개별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전체성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전체성이 아닙니까? 자신의 한계적인 정체성을 넘어서는 고차원의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고는 그 단계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의문은 당신의 절대적 현존(I AM Presence)이 고차원의 존재를 넘고, 고차원의 존재를 넘어 창조자에게 연결되는 걸 깨달을 때까지, 당신이 자신의 고차원 자아의 감각을 얼마나 빨리 확장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존재들의 사슬의 통합이 아닙니까?
개별화의 의미는 분리라는 환상을 어떻게 극복하겠습니까? 신은 당신이고 당신이 신이라는 걸 깨달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신은 없고 당신의 더 큰 자아만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개별화이지만 전체를 경험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번 설명한 데로, 당신의 절대 의식(The Conscious You)은 형태를 넘어섭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 - 신에 대한 어떤 마음의 이미지 -를 초월하고 신의 전체성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여전히 지구에서 물질적 육체 안에 있는 동안 전체성을 경험하는 것은 정말로 어렵지만, 모든 개념, 단어들과 마음의 이미지를 헛되고 무관하게 만드는 신과 하나 됨의 경험은 분명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이 개념과의 관계를 멈추고 진정한 신의 무한한 본질을 경험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 순간 자기(self)와 절대적 자아(Self) 간의 장벽은 허물어지기 시작하면서, 당신은 지구에서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어 상승된 의식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개별화의 수수께끼가 대조를 초월하는 하나 됨의 경험을 통하여 해결됩니다.
여전히 물질적 형태에 있고 더 큰 존재의 개별화임을 인식하는 동안 신과 하나됨은 어떤 느낌일까요? 다시 강조하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나 있는 단어들을 사용한다면, 당신이 외부적 존재와의 관계를 초월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외부적인 존재를 찾고 끌리는 것을 멈추고 대신에 신을 당신의 내면에 있는 존재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외부적인 존재가 나타나서 당신을 위해 무엇인가 해줄 것이라는 생각 대신에 내면의 신이 당신을 통해 무언가 하는 걸 허용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 됨이 개념이라는 단계를 넘어서서, 단어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에고의 양극성의 의식은 당신이 하나됨을 느꼈다고 착각하게 만들, 하나 됨의 세련된 개념을 창조할 수 있는 완벽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됨의 경험은 단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단어에 집착하는 동안은 하나됨에 있지 않습니다. 단어는 오직 하나됨을 설명할 때만 필요합니다. 설명은 하나됨이 개념일 때만 사용되며 직접적인 경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하나됨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 이 질문 ‘내가 하나됨에 있는 걸까?’에 대한 해답은 '항상 아닙니다!’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됨에 있다면 그 질문은 부적절하고, 하나됨에 있다면 태양인 당신의 존재가 드러나기 전의 이슬처럼 그 질문은 사라질 것입니다.
Copyright © 2010 by Kim Micha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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