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틸 스완 Teal Swan
대부분 우리는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에서의 목표에 대한 명확한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깨닫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 깨달음이 어떠하리라는 그림이, 영적으로 깨달은 이에 대한 완벽한 이미지 등이 머리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들이 모르는 것은, 그 이미지는 우리가 자신에게 지속해서 말하고 있는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수 천년 동안 매일 우리 삶의 성쇠는 윤회의 파도로 설명되어 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적인 수련에 헌신하는 이들을 파도타기를 하는 서퍼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의 수련은 그러한 파도를 타는 연습이며 언젠가는 그 파도와의 관계에서 마스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퍼처럼, 초기에 우리는 파도 위로 떨어져 계속 반복해서 이리 저리 뒤집혔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연습할 수록, 파도의 한가운데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더 잘하게 되었습니다. 충분한 연습을 거친 후에는 결국 서핑보드에서 떨어지는 일이 드물게 될 것입니다. 서핑보드에 있으면서 점점 더 큰 파도를 탈 수 있게 됩니다. 깨달은 존재는 마스터 서퍼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파도가 오는 것을 멈추게 하는 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깨달은 존재는 파도타기의 명수가 되어서 파도가 오는 걸 멈추게 하는 마법의 단추를 누르는 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큰 파도가 더 이상 그 혹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은 존재는 자신들이 지금 유지하는 바로 그 깨달음에 대한 결과로써 파도를 봅니다. 그래서 그 파도를 환영합니다.
영적으로 깨달은 사람도 다른 이들처럼 여전히 감정의 모든 영역을 경험합니다. 변화된 건 고차원 자아와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각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얻은 것입니다. 한 감정에서 다음 감정으로 생각의 틀을 의지로 이동시킬 수 있는 의식적 능력을 얻은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진실한 이야기(우리가 얘기하고 싶지 않아하는)는 붓다(Buddha)도 험난한 시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마라(죽음의 신, 애욕의 신)와 마주 쳤을 때 고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붓다의 삶 동안 반복해서 돌아왔습니다. 깨달음으로 붓다가 얻게 된 건 그가 마라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마라는 단지 붓다 자신의 에고의 부정적인 측면의 구체화라는 것입니다. 붓다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비록 그는 처음에는 두려움, 유혹, 의심과 같은 감정을 느꼈지만, 그러한 투사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많은 고대의 문헌에 따르면, 붓다는 마라와 친구가 되어 차를 함께 하기 위해 초대까지 했다고 나옵니다. 붓다는 마라를 그의 가장 가치 있는, 지속적으로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준 스승으로 깨달았습니다. 결국 마라 없이는 그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에서의 목표에 대한 명확한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깨닫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에고를 비우고 싶어합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고통에서 자유롭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그 깨달음이 어떠하리라는 그림이, 영적으로 깨달은 이에 대한 완벽한 이미지 등이 머리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들이 모르는 것은 그 이미지는 우리가 자신에게 지속해서 말하는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삶 그 자체에서 은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흥망성쇠를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의 흥망성쇠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면서, 깨달음은 그것을 피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었습니다. 고통을 겪으면서, 깨달음은 하루 24시간 동안 더 없는 행복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만들었습니다. 깨달음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깨달은 후라도 당신은 여전히 물질적 삶을 살아야 하는데, 물질적 삶은 확장을 창조하는 수단으로 고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삶은 배움을 위한 홀로그램입니다. 살아 있는 그 누구도 확장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삶의 대조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대조가 있어야,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자각뿐만 아니라 당신 내면에서 현재 원하는 것에 대한 자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법을 사용하여 지속적인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끝을 의미합니다. 그 지점에서는 더 이상의 확장은 없으며, 크게 볼 때 우주에서의 역할은 없습니다. 우주에 봉사하는 것은 영원한 확장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자신이 배운 것과 통합해 나가야 합니다. 여전히 당신이 얻은 영적 자각이 매일의 삶 속에 통합해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비록 삼사라(윤회) 파도는 결코 멈추지 않지만, 당신이 좀더 깨달을수록 당신의 사고는 좀더 바뀌게 됩니다. 당신의 관점은 근원적 관점의 진동과 일치되도록 변화해 갑니다. 그러면 당신의 경험에 대한 의미가 변화합니다. 성쇠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변화하게 되며,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경험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종교적 전통과 믿음 체계는 자체적으로 함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단체에서 가장 큰 함정들 중 하나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지나치는(bypassing)”것 입니다. 지나치는 것에 대한 의미는, 우리는 흔히 자신을 지나치게 되고 자신의 진정한 느낌을 지나치게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도달하고 싶은, 종교적 믿음이나 진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기도 합니다. 집중하는 것으로 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는 걸 아는 대부분의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의해 일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거나 관찰할 때 기분이 좋지 않으면 무시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은 이미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면서 급히 다른 방향으로 선회할 때, 사실은 우리의 느낌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저항하는 것은 지속됩니다. 우리는 피하고 무시하려고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 기분 나쁜 상황에 잡아두게 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뒤 돌아서서 그들을 마주보고 완전히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빨간 깃발입니다. 그것은 항상 당신이 개인적 확장의 교차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피한다면, 배움과 확장 또한 피하는 것입니다.
도로 위에서 운전하고 있을 때, 타이어가 펑크가 난다면 당신은 계속 운전하면서 그것을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멈추고 그 타이어 상태를 살펴보고 방법을 강구할 것입니다. 무시하고 그대로 운전하면서 실제로 느끼고 실제로 생각하는 것을 회피하는 일은, 상징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느껴야 하고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무감에 따라 자신이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영적인 단체에서 영적으로 깨달은 사람의 행동(우리 생각에)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일종의 암묵적인 문화적 기대가 되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실제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해도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있어야 할 지점(우리 생각에)을 추구하면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서 있는 지점을 무시하게 되는 문화적 기대가 되었습니다. 결국은 대부분의 우리들은 받아들여지는 감정만을 느끼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우리가 행복해 하지 않는다면 실패한 것처럼 느낍니다.
마치 우리가 직면한 투쟁의 고통과 투쟁 그 자체가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고통을 겪기 시작할 때 죄책감과 당황스러움으로 그 투쟁을 포장합니다. 우리는 자신만의 방식을 떠나서, 외적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겪은 험난한 경험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험난한 경험에 대한 수치심으로, 지금 순간에 자신의 고통의 깊이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자신에 대한 진실이 아니며, 자신을 힘들게 채찍질하며 연습한 배우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진실은, 지금 상처를 경험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심해서, 숨조차 쉬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 속에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 경우는 “다른 모든 일들은 잘 되고 있으니까, 곧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 하면서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을 치장하는 일종의 자아 학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당신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은 영적으로 상승한 이들이 투쟁을 대하는 자세를 따라 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연기하는 배우로써 흉내 내고 있는 것 입니다.
우리의 감정적인 측면은 아이들입니다. 이는 당신이 깨달음에 이르렀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정적인 측면은 결코 성장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의 감정적인 측면을 잘 돌보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이 실질적으로 느끼는 것을 부정한다면, 당신의 내면에서 느낌을 절망적으로 표현하려고 울고 있는 아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느끼는 걸 부정한다면, 진정으로 기분이 좋은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를 알고 싶다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 것뿐만 아니라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지도를 들고 방향을 찾으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환자의 현재 상태를 알아보는 것을 거부하면서, 환자가 나빠지는 이유를 해결해주려는 의사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 중 하나는 자신이 느끼는 걸 인정하고 “나는 내가 지금 있는 자리를 받아들인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실패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포기하고 기분이 나빠지는 것에 대해 항복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용감하고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함으로써 더 이상 자신의 현 위치에 묶여있지 않게 됩니다. 투쟁하는 것에 부끄러움은 없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성격상의 결함은 아닙니다. 험난한 시기를 거쳤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붓다도 험난했던 시기가 있었고, 예수도 그러한 시기가 있었으며, 마호메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은 대조의 상황에서 예외인 단 한 사람(그들이 상승한 마스터이든지 상관없이)도 만날 수 없으며, 일주일에 7일, 하루 24시간 동안 깨달음의 상태에 있을 수 있는 단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를 기대한다면 잔인한 짓입니다. 깨달음의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낀다면 잔인한 것입니다. 자신이 일주일에 7일, 하루 24시간 동안 깨달음의 상태에 있기를 기대한다면 잔인한 것입니다. 영성 단체 내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잔인한 짓을 멈추고, 자신이 창조한 것에 책임을 질 때입니다. 영적인 수련은….말 그대로 수련입니다. 영적인 마스터도 해야 하는 수련입니다. 깨달음의 상태란 우리가 노력해서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어야 할 상품이 아니며, 한번 받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행하든지 상관없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우리가 가치 있음을 증명하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노력해서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깨달음에 있을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것이며, 부정은 깨달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래서 질문은: 당신은 지금 자신을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http://www.thespiritualcatalyst.com/articles/even-the-buddha-had-bad-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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