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틸 스완 Teal Swan
자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모든 삶의 배움 들 중 정점입니다. 성장하고 있는 그 밖의 모든 것에 있는 근원입니다. 자기 사랑은 모든 다른 여정들의 깨달음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인 여정입니다.
모든 이들을 향해 손짓하는 전체성(Wholeness)이 있고, 우리는 자신들의 귀에 울리는 그 노래를 가지고 태어났으나, 제일 먼저 그것의 부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른이 되었을 때는 그 부재함이 우리 내면에 너무 크게 자라나서, 외부적으로도 채울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의 도망은 대항할 수 없는 전쟁이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반복되는 트랙에서 죽음의 상태를 멈추고 이제 그 싸움은 끝났다고 결정하는 시점입니다. 이러한 평온은 받아들임으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동화에서 나오는 “그 이후 영원히 행복한” 상태는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세계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오직 내면에서만 이를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태를 약에 중독된 듯, 필요이상으로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내면에서 그것의 부재는 너무 깊고 공허해서 일종의 살아있는 고문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약에 너무 중독된 나머지 그 해답이 쭉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추구하는 전체성(Wholeness)이란 무엇일까요? 그 전체성은 사랑입니다. 그 전체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성장하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 가장 중요한 카드입니다. 여기가 우리의 여정의 정점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단지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과는 다른 모든 형태로 변환되어 있습니다. 이 의미는 한 사람이 자기 사랑에 대한 실천을 시작하게 되면, 사랑 받지 못하고 치유되지 못한 모든 부분의 껍질을 벗기고 다시 드러나도록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자각, 진실, 평정, 용서, 자립심, 신뢰, 책임, 감사, 자각, 연민, 통합, 자유, 놓아주기, 기쁨과 제한 없는 사랑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에 대한 사랑의 여정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모든 다른 여정의 깨달음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 여정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자라면서, 자기에 대한 사랑은 자만이고 이기적이라고 간접적으로 배웠습니다. 겸손과 복종을 헷갈려 하는 어른들에 의해, 자기 비하는 미덕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것이 자신에 대한 사랑이고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기적이고 자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됨(Oneness)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삶에서 그 부재를 너무 깊이 느낀 나머지, 다른 이들과 다른 이들의 저장 창고에서 그것을 취하려고 하는 이들입니다. 자멸적인 자만심으로 자신들의 불안함을 감추고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이들은 자신의 내면적 필요로 인해 넘쳐날 정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풍요로움 속에서 어떠한 부족함도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이에게서 필요한 것은 없으며, 대신의 그들의 사랑은 다른 이들에게 넘쳐 흐릅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가치와 상관없는 자신들의 약함과 강함에 대해 정직합니다. 그러한 정직으로 인해 겸손함의 안정적인 바탕이 만들어집니다.
자기 사랑은 자아의 가장 높은 차원의 훌륭함을 위한 바람입니다. 자기 사랑의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흔들리지 않고 보태거나 뺄 것이 없이, 흐려지거나 강조할 필요 없는 그대로 자신이 가진 가치를 깨닫고, 그에 따라 자신의 가장 훌륭함과 일치하는 행위와 생각을 선택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사랑은 전체성 혹은 자아 통합의 상태입니다. 자신에 대한 순수한 감사에 집중하는 상태입니다. 이 집중은 신뢰, 자기 허용, 자존감과 깊은 내면의 평화와 즐거움을 이끌어 줍니다.
아마도 진동의 차원에서, 자기 사랑은 자신에 대해 절대 저항하지 않은 상태임을 아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자신과 자신의 위치에 저항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랑을 보여주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을 정의 내리는 것을 찾아봐야 하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새로운 결정에 대한 그림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가장 저항이 적은 방식을 택합니다. 어려운 방식은 미덕이 아니며 일종의 자기 학대입니다. 자신에게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세요. 지금 이순간(자신의 위치에 대해 정직하게) 자신에 대해 진실로 어떤 점을 존경합니까? 거울을 보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완벽”하다는 것이 결코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세요.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머리 속에 있는 완벽함의 이미지와 경쟁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사랑은 남이 아닌, 지금 당신에 대한 것입니다. 당신이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충분하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충분합니다.
이 과정의 초기단계일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증오의 마음으로 꽉 차서 사랑이라는 것을 맛볼 수 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대신에, 우리는 하루 종일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 특별히 결정을 해야 할 순간에…..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만약 내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자기 사랑에 대한 여정은, 자신과 진정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존중으로 시작합니다. 이 의미는 우리가 삶에서 기쁨과 성공 혹은 아픔과 고통을 창조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존재라는 최고의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만큼, 당신이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생자로 운명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선택할 힘이 있으며, 이 힘은 우리가 가진 가장 위대한 책임과 가장 위대한 기회입니다.
특별히 자신에게 정직하게 말한다는 것은 벅찬 일 일수 있습니다. 자신의 즐거움, 바람과 가치에 따라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존중하는 것은,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가지는 평가에 공들이는 일을 기꺼이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제외하고 누구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헌신한다면, 때때로 경로를 바꾸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 모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은 우리의 느낌과 이러한 느낌에 대한 반응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느낌(나침반과 같은)은 어느 때라도 우리가 진정한 자아의(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혹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 것이 삶에서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 지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느낌을 좋게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을 만큼 용감하다면, 삶에서의 다른 모든 조건들은 그에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당신이 지속적으로 좀 더 강력하고 좀 더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당신이 지금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은 과거에서 오늘에 이른 지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완벽한 곳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의 관점에서 좀 더 나아지기 위한 바람은 자신의 가장 훌륭한 모습에 대한 바람과 동일한 것이며, 자신이 충분히 훌륭하지 않다거나 사랑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믿음으로 사고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고 이익이 되는 믿음만 유지합니다. 자신들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놓아줍니다. 자신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세요. 당신이 이 삶에서 왜 한계를 택했는지를 이해하고,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인정하세요.
우리는 무력해지는 것이 흔히 관심과 사랑을 얻는 길이라고 삶의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허용, 관심과 사랑을 얻기 위한 자신의(다른 사람도 함께) 의도를 살펴보세요.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사랑 받기 위해 어떤 것을 배웠는가? 내 삶에 책임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배웠는가?” 잘못된 패턴을 습득한 것이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는 바꿀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놔 둘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두려움이 삶에서 작동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또한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단지 자신이 여태까지 감옥에 갇혀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감옥에서 풀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흔히 우리가 고통을 야기시키는 조화롭지 않은 것을 만들었을 때, 그것은 마음의 상처가 됩니다. 우리는 이 상처를 매일 의식 혹은 잠재의식에서 품고 있습니다. 고통은 족쇄가 되어 삶을 살아가면서 너무 익숙해져 우리가 그것들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합니다. 사실상 용서라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닌 우리 자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용서를 받는 쪽이라면 기분이 좋을 수도 있으나 그일은 오직 우리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이든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든 어쨌든 용서라는 것은 단지 일방적입니다. 다른 이를 용서하기 위해 그 사람이 꼭 앞에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치유는 오직 우리 내면에서만 일어납니다. 실수를 한 자신을 용서하세요. 실수는 가치와는 상관없습니다. 대중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용서는 약한 것이 아니고 강한 것입니다.
많은 우리들은 만약 자신을 용서한다면, 우리 자신의 약함을 허용하고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다는 진실이 아닌 제한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다면 다른 이들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이는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초기의 삶들에서 우리에게는 선천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고, “나쁘게”타고 났다는 거짓된 믿음을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용서를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지배할 수 있지만 그것을 “훌륭함”과 미덕이라고 배우면서 일종의 처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용서를 허락하지 않음은 자기 학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그 증거와 자신의 타고난 '훌륭함'에 대한 누적된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지구 위의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사랑을 지적인 개념으로 알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천성적으로 압니다. 우리가 사랑을 아는 이유는 가장 근원적인 수준에서 우리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육체에 있는 우리들은 근원 에너지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근원 에너지의 확장이며 근원에너지는 정확히 사랑과 동일한 진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것이며, 그 사랑에 저항할 것인지 지금의 삶에 허용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있습니다. 우주는 말 그대로 사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당신의 타고난 권리입니다. 태양을 향해 꽃잎을 여는 꽃처럼,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연다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삶을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창조하고 진심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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